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지 H. W. 부시 (문단 편집) === 재임 행적 === [youtube(TImO_RquoW8)] [[파일:external/glencoe.mheducation.com/image6.jpg]] [[걸프전]]을 앞둔 1990년, 사우디 주둔 미군들을 시찰하는 모습 [[http://www.history.com/s3static/video-thumbnails/AETN-History_Prod/24/120/History_Bush_on_Persian_Gulf_War_Speech_SF_still_624x352.jpg|1991년 1월 17일, 걸프전 시작을 알리는 TV 발표 모습]] 비록 집권 과정은 긍정적 이미지와 거리가 멀었지만, '''재임 시절의 치적은 분명 긍정적이었던''' 지도자.[* 이 점에서 조지 허버트 부시를 '재선에 실패한 미국 대통령들 중에서는 최고'(best one-term President)로 평가하는 시각도 있다.] 재선에 실패해서 임기가 4년밖에 되지않지만 현대사의 중요한 사건들은 다 겪었다. 1989년부터 1993년까지 재임 4년의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베를린 장벽]]과 [[1989년 동유럽 혁명|동유럽의 공산주의 블록이 무너졌고]],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이 [[소련 붕괴|해체]]되어 전 인류를 반으로 갈라서 공포에 떨게 했던 [[냉전]]이 종식되는 그야말로 '''대격변'''이 도래했다. 구 소련과 공산권의 붕괴로 인한 힘의 공백을 파고든 이라크를 [[걸프전]]에서 다른 국가들과는 비교를 거부하는 첨단 무기와 효율적인 운용으로 제압하면서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 미국의 위상을 확고히 하였다. 그야말로 '''팍스 아메리카나'''의 시대를 연 것이다. 지지율이 최대 89%까지 치솟았고 92년도 대선 상대였던 [[빌 클린턴]]은 부시의 재선이 확실하다고 여기면서 출마를 망설였을 정도였다. 하지만 [[로스 페로]]의 등장으로 인한 보수층의 분열과, 끝내 경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점을 파고든 [[빌 클린턴]]에 밀렸다. 고작 37.4%를 득표하며 [[1992년]] 재선에 실패했다.[* 당시 빌 클린턴의 '문제는 경제야, 이 바보야!(It`s economy, stupid!)' 구호가 유명하다.] 재선에 도전할 시기에 터져나온 사건들도 [[영 좋지 않다|영 좋지 않았는데]], 대표적으로 1992년에 [[테일후크 스캔들]]이 전미를 들썩였다. 걸프전 참전 군인, 그것도 하필 부시의 먼 후배들이라 할 수 있는 '''해군 항공장교들의 대규모 성폭력 스캔들'''이었던지라 해군 조종사 이력이 있는 부시에게까지 좋지 않은 이미지를 전염시켰다. 재임기간중 한국에는 1989년과 1992년 두차례 방한했다. 북한의 핵활동이 점차 가시화 되면서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추진하고 팀스피리트 훈련도 취소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했으나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 탈퇴로 빛이 바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